지난 가을, 우연히 연남동 서점에 갔다가 한 권의 좋은 시집을 만났습니다. <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> 진은영 시인님의 시집 제목이기도 하고, 시 '청혼'의 앞부분이기도 합니다. 시가 너무 좋아 계속 읊게 되네요. 소개해 볼게요.
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, 소개
지은이 진은영 시인님은 1970년생으로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<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> 외 3편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시작했습니다. 시집으로는 <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>, <우리는 매일매일>, <훔쳐가는 노래>가 있습니다. 수상도 많이 하셨는데요, 대산문학상, 천상병 시문학상, 현대문학상등을 받으셨어요.
시집 첫 페이지 '시인의 말'이 인상적입니다. "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."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.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.
찬란함
처음 시집을 만나고 저는 그만 첫 장에서 얼어붙은 사람처럼 읽고 또 읽었습니다. 시를 읽는 동안 한무더기 찬란한 은빛 구름이, 은빛 싸라기눈가 지나가는 것 같았어요. 시가 맑고 청아합니다. 내용은 그리움이 묻어나지만 이 시에서 받은 저의 느낌은 찬란함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. '청혼' 시 소개해볼게요.
청혼
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
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
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
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
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
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
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
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
- 중략 -
시를 읽으면 오랜동안 사랑한 어떤 사람이 떠오르고, 화자는 그 사람을 참 사랑했고 그가 아프지 않도록 옆에서 도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덮쳐 그리워하는구나.. 그런 생각이 떠오릅니다.
한 구절 한구절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에 가 닿고, 계속 읽고 또 읽습니다. 오래된 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? 프라하의 낡은 벽돌담길을 걷는 것도 같고, 어린 시절 친구를 부르며 뛰어놀던 골목길들이 생각나기도 하고, 꺄르륵 짝꿍 손잡고 추운 거리를 걸었던 그 겨울길도 생각이 납니다. (시는 여름인데 저는 왜 겨울이...)
시집에서 기억에 남는 시
아름답고 가슴에 오래 여운을 주는 청혼 시입니다. 이 외에도 <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>에 실린 시중에서 저는 <카살스>와 <빨간 풍선>이 기억에 남습니다. 시 들이 전반적으로 그립고 외로운데 언어들은 이슬처럼 영롱합니다.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익숙한 표현이 다시 한번 떠오르는 시집이에요. 참 좋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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